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야 문명 (문단 편집) == 예술 == 현재 남아있는 마야 문명의 예술은 곧 왕실 예술, 혹은 엘리트 계급의 예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까지 남은 모든 마야 유물들은 죄다 왕실이나 엘리트 계급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평민들이 향유하던 것은 거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도 평민들이 즐기던 예술이나 문화는 존재했겠지만 썩기 쉬운 목재나 흙으로 만들어 모두 삭아 사라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돈이 많은 엘리트층들은 썩지 않고 오래가는 돌이나 보석류, 옥 따위로 예술품들을 만들었기에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마야인들은 녹색과 청록색을 사랑했다. 이 두 색깔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단어로 불렀으며 금색보다도 높게 평가했다. [[투탕카멘의 가면]]이 금으로 만들었다면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의 장례가면은 [[옥]]을 깎아 만들었으며 귀족들은 옥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달고 아예 치아에 옥을 박아넣는 경우도 있었다. [[치첸 이트사]]의 피라미드 방 안에서 발견된 [[재규어]] 왕좌 역시 붉은 사암으로 만들고 거기에 옥으로 만든 눈을 박아 만들었을 정도로 옥은 대단히 중요한 재료였다. 왜 마야인들이 옥을 이정도로 숭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야금술이 없어 아직 금속류의 발달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단단한 옥이 더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다른 단단한 재료인 흑요석도 확실히 날카롭고 단단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치게 잘 깨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옥은 흑요석에 비해서 훨씬 내구도도 높았고 오래갔다.] 뿐만 아니라 메소아메리카에서 옥이 상당히 희귀한 광물이다보니 스스로를 과시하고 싶은 지배층들의 마음에 쏙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야인들은 옥의 푸른빛을 [[물]]과 생명에 연관시켰으며 태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현재까지 남은 마야 예술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건 당연히 수많은 석조 부조와 돌조각들이다. 마야학자들은 이 석조 유물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했는데, 크게 '석비(Stela)', '상인방(Lintel);, '판넬(Panel)', '제단(Altar)', '의례용 계단(Monumental Stair)', '왕좌(Throne)' 등이 있다. 일단 석비가 개중에서 가장 수도 많고 모든 도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만들어낸 보편적인 유물에 속한다. 길쭉하고 큼직한 돌 하나를 통째로 깎아 거기에 왕이나 신들의 형상, 상형문자들을 빼곡히 새겨놓은 것을 석비라고 부르는데, 주로 왕을 신격화하거나 신의 영광을 기릴 목적으로 세워졌다. 특징이라면 왕의 얼굴이 보편적인 인간의 얼굴로 표현될 뿐 딱히 개인적인 특징을 묘사하지는 않는다는 것 등이 있다.[* 즉 초상화처럼 해당 석비에 왕의 얼굴 특징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눈과 코와 입이 달린, 정말 기본적인 인간의 특징만 묘사했다.] [[코판]], [[티칼]], [[팔렝케]], [[칼라크물]] 등 웬만한 대도시라면 무조건 수십여 개는 세워져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d3d9bd5-b7da-43a8-9d90-1250f68b4f844ec2dbcf50b190efb2_pakkkk.jpg|width=27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70638a80e053015e800c2d90f4e81c39bb60975.jpg|width=148]]}}}||{{{#!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opanaltar5.jpg|width=206]]}}}||{{{#!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22e5378b2f6716ffa6ebe9c970c24b1.gif|width=40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unhv6xVYAE9-nM.jpg|width=236]]}}}|| || 파칼 왕의 데스마스크 || 석비 || [[코판]]의 제단 || 옥을 박은 [[재규어]] 왕좌 || [[옥수수]] 신의 도자기 인형 || 상인방은 건물의 기둥들 위에 가로로 길게 걸쳐 올려놓은 석재들을 의미한다. 건물 모든 곳에 조각을 새기던 마야인들답게 상인방에도 섬세한 부조들을 아로새겨놓았는데, 이들 중 보존된 게 많아 고고학적 가치가 높다. 가장 유명한 상인방은 [[약스칠란]]에서 발견된 상인방. 판넬은 건물 벽에 덧대 세워놓거나 교각, 플랫폼 측면에 붙여놓는 용도의 거대한 판짝이었다. 특히 [[팔렝케]]에 보존이 잘된 판넬이 많으며 파칼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거대한 무덤 덮개도 이 분류에 속한다. 제단은 둥글거나 작사각형 모양의 납작한 돌덩어리인데, 제물을 바치는 제단일 가능성이 커서 제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때때로 서너 개의 바위 다리가 달려있는 경우도 있다. 의례용 계단은 피라미드나 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인데,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경우 따로 구분한다.[* 이 분야의 최고봉은 [[코판]]의 의례용 계단. 무려 2,200여 자의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마야 유적들 중 단일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다.] 왕좌는 말그대로 왕이나 귀족들이 앉던 의자다. 이게 조금 더 낮고 길어지면 벤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재 유물만을 언급했지만 사실 마야 문명 당시에는 목재 유물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덥고 습한 마야 기후 탓에 목재 유물들은 죄다 썩어 사라졌고, 결정적으로 스페인 식민당국이 목재 유물들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보이는 족족 불태워버렸기에 남은 게 거의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티칼]]의 피라미드 유적에서 뜯어온 목재 상인방에 새겨진 섬세한 부조들이 유명하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목재 거울 받침대가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이 목재 거울 받침대의 경우 한 남성이 거울을 받치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가공의 정교함이 7세기의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지금은 모든 사원이 칙칙한 회색 투성이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녹색, 푸른색, 금색, 붉은색 등 다양한 색깔로 형형색색 칠해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왕궁이나 사원 내부에는 화려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주요 모티브는 전쟁에서의 승리, 왕의 업적에 대한 찬양, 신화의 모습 따위였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벽화들은 습한 마야 기후 탓에 곰팡이가 슬고 씻겨내려가 거의 알아볼 수조차 없는 수준이지만 [[보남팍]] 유적에 굉장히 잘 보존된 벽화가 남아있다. 포로들을 처형하는 모습, 전장에서 맹위를 떨치는 왕의 모습, 춤을 추는 후계자들의 모습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고고학적 가치는 매우 높다. 무덤이나 동굴처럼 깊고 신성한 곳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붉은색이나 금색처럼 화려한 색을 많이 쓴 사원, 왕궁 벽화와는 달리 이 곳에 그린 벽화들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가끔씩만 붉은색을 사용해 정적인 느낌을 준다. 다만 마야 전통 벽화의 제작 자체는 이미 16세기에 맥이 끊겼다고. 마야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게 [[도자기]]다. 마야인들은 점토를 그러모아 재나 모래와 섞었고, 이를 반죽해 길게 돌돌 늘린 다음 원통형으로 감은 뒤 매끄럽게 다듬고 가마에 구워 도자기를 만들었다. [[물레]]는 아직 발명되지 않아 사용하지 못했다. 가마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마가 아니라 나무, 숯, 풀 등 다양한 잡재료들을 몽땅 때려넣고 불을 피워 도자기를 굽는 식이었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도자기들은 귀족들의 가보로 취급받던 사치재다. 원통형의 화병에는 신화나 코덱스의 내용이 새겨졌고 원통형 그릇, 뚜껑이 달린 접시, 사발 등은 만들기가 어려워 아무나 쓸 수도 없었다. 가장 독특한 도자기는 [[팔렝케]]에서 발견된 향로. 신 혹은 왕의 얼굴을 한 향로인데 안이 비어서 입으로 연기가 새어나온다. 이외에도 귀족들의 조각상이나 신의 조각상 등 도자기로 만든 인형들도 볼만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